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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최고의 진리

♡꿈에서깨어나♡ 2009. 1. 23. 15:34

[스크랩] 우주 최고의 진리.
   
꽃을 보면 꽃이 되라.
달을 보면 달이 되라.
그것을 보면 그것이 되라.......
이것이 우주 최고의 진리인 것 같다.
며칠 전에 그것을 길게 시처럼 쓰기도 했지만 줄이면 이것이다.
무엇이든 보면 그것이 되는 것!
그 시를 포함해서 오래 된 글을 다 지웠다.
이미 볼 사람은 다 보았고 누가 더 찾아볼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왜 글을 쓰냐 하면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글을 쓴다.
나는 그때마다 생각하기를 ..누가 어떤 영혼이 내 글을 읽기 원하는가보다.. 했었다.
지금도 그래서 아까운 시간을 들여가며 이 글을 쓰게 된다. 누군가 한 영혼을 위해..
이제 내용으로 들어가면..
그것을 보면 그것이 되는 것...이 우주최고의 진리인 이유는 만약 어떤 진리가 다가오더라도 바로 그것이 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면서 그것이 되는 것...은 나의 체험중에서도 최후의 체험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나는 별로 겪지 않았다. 그 대신 마음의 체험이라 할 만한 것은 여러 각자들의 체험과 일치하였다. 
그것을 나는 더욱 신뢰하게 되는 이유가..그 체험들을 하기 전에 나는 그 체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심리적인 투사라거나 자기암시의 효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나에게 다가온 느낌들을 알아보기 위해 나중에 책들을 보았고 그 결과 공통점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覺者들 모두 일치하였다.
覺者의 공통된 특징이라면 서너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현재를 느끼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저절로 위빠사나가 되는 것.
그리고 시간에 대한 통찰력. 시간이 상대적인 세계에 생긴 어떤 현상이고 점의 연속이 아니라 통째로 존재한다는 것의 발견. 그 다음 공통되는 것이 보는 것과의 일치이다.
그런데 이 네가지는 실은 모두 하나와 마찬가지다.
어느 하나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순차적으로 다가올 순 있어도 같은 인식의 다른 측면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감각에서 가장 진리에 가까운 말이라면 보는 것과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순간을 사는 것! 도 좋은 말이지만 보는 것과의 일치에 비하면 조금 미흡하다.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에고가 산다는 것이다. 순간 순간 에고가 보여지는 것으로 녹아드는 것인데  녹아들기 전에 에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불필요한 단계가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런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제자들에게 자기의 상태를 전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할 뿐이다.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과도기적인 그런 단계가 징검다리로서 더 필요할 것이다. 그는 제자를 돕기 위해 그런 말을 할 뿐이다.  
저절로 위빠사나가 되는 것은 어떠한가? 사실 이것만 해도 엄청나다. 저절로 위빠사나가 된다는 것은 신의 눈으로 자기 에고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자기안의 신을 깨달았다는 것이고 그와 합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꿈에서도 자기를 보고 나아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그런 사람은 죽을 때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고 화를 내도 화내는 것이 아니고 단지 화를 바라보는 경지이고 화에 대해서조차 거부감을 만들지 않는 경지이고 죽어도 죽지 않는 경지이다. 색즉시공에서 다시 공즉시색으로 와야 이런 경지가 되는 것이다. 360도 완전히 돌아 空을 거쳐 다시 色으로 온 것으로 깨달음의 끝이라 할 수 있다. 죽으면서 차심광명 역부하언..이라 말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런데 또 뭐가 미흡할까? 현생을 즐기면서 창조를 즐기면서 또 한편 영원한 삶을 즐기는 이런 경지에 뭐가 미흡할까? 그런 경지는 무아만 있는 좁은 의미의 空에서 다시 자아로 왔다. 空의 눈으로 色을 바라본다. 그래서 空과 色이 병존한다. 무아와 자아가 공존한다. 무아이면서 자아이고 자아가 무아와 다르지 않음을 안다.
그런데 이때 거기에는 뭐가 있을까?
無我가 있다. 空이 있다. 아직 색으로 온전히 오지 않았다. 한 발은 空에 한발은 色에 걸쳐둔다. 그런데 空에는 한발을 걸쳐둘 자리가 없다. 空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보는 無我는 말 그대로 없다. 
空은 우리가 창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眞有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절로 위빠사나가 되는 것은 眞空妙有의 경지이다.
이제 다시 眞有妙空으로 가야 한다. 이때 眞有는 空을 통해 두 개의 色으로 나뉜 하나의 有이다. 妙空이란  色사이의 시선이다. '보는 것' 이다. 두 개의 色 사이에서 虛空의 시선이 나온다. 허공의  시선이 두 개의 色을 하나로 되게 한다. 원래 하나였던 有가 空을 거쳐 色을 만들고 色은 空을 통하여 다시 하나인 有가 된다.
眞有속에 妙空이 있다. 하나속에 하나로 돌아오는 시선이 있다. 이것이 진유묘공이다.
진유묘공이 될 때 그것을 보면 그것이 된다.
그런데 이는 말을 이렇게 할 뿐이다.
지금 이순간을 사는 것..과 저절로 위빠사나가 되는 것..과 보면서 그것이 되는 것..은 같은 것이다.
覺者들은 단지 여러 방편으로 말할 뿐이다.
만약 진정으로 현재를 산다면.. 무엇을 보든 그것이 된다. 화가 나면 화가 되고 부끄러우면 부끄러움이 된다. 달을 보면 달이 되고 꽃을 보면 꽃이 된다.
저절로 위빠사나가 될 때 無我를 보면 無我가 된다. 色을 보면 色이 된다.
그러니까 현재를 사는 것도 여러 급이 있고 저절로 위빠사나가 되는 것도 여러 급이 있고.. 그것을 보면 그것이 되는 것..또한 여러 급이 있는 것이다. 정상에서는 모두 같다. 
이제 그것을 보면 그것이 되는 것..에 대해 좀 설명하자면..
이것도 다른 말들처럼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것은 정말 그것을 느껴보지 않으면 모른다.
정말 그것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보면서 정말 그것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풀밭에 앉아있다가 기어다니는 개미를 내려다본다고 하자.
그럼 정말로 그 개미가 되어야 한다. 되어야 한다! 가 아니라 저절로 되는 것이다.
정말 그 개미가 되는 것! 이다. 이때 그 개미의 시각으로 나를 본다고 할 수도 있다.
정말 개미가 되는 상황을 묘사해보면..
우주가 정지한다. 시공간이 개미와 나 사이에서 녹아서 흐늘흐늘거린다. 개미만 보인다. 무언가 새로운 차원의 문이 덜커덕 열리는 것 같다. 개미를 분명 내가 보고 있는데 개미가 내가 아닌것이 아니다. 개미는 내 눈속에 있건만 개미가 분명히 나다. 그러니 말로 하면 도무지 말이 안되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개미가 당연히 나다. 왜냐하면 바로 개미가 나니까! 개미가 나에게 속삭인다. 그것은 실은 속삭이는게 아니라 내가 개미가 되어 생각한다. 개미인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개미가 되어 사람인 나를 보면서 저건 나야..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냥 단박에 알아채는 것이다. 
나는 항상 그렇지는 않다. 그래도 자주 그렇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 사람들 마음이 잘 보인다. 나무나 개미들의 마음도 느껴지는 것 같다.
이것을 착각이나 환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학공부를 한 사람들은 달리 뭐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 한 두명은 깊이 무언가 전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나는 글을 쓸 이유가 없고 글을 써서 얻으려는 바도 없는데 이 글을 지금 어쩔 수 없이 쓰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맘에 안드는 저런 제목을 불쑥 달고 말이다. 제목도 내가 달은 것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이 글을 읽게 될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보면 그것이 되는 이치..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다.
누가 나를 죽이려 할 때 나는 그 죽이는 자가 되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야기하기보다는 홀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글쓴이;송재광

원본 : 우주 최고의 진리                                                      http://blog.empas.com/muti007/14324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