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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각지(見聞覺知)

♡꿈에서깨어나♡ 2017. 11. 21. 19:10












  조사선선은 “마음(心)”으로부터 “사람(人)”에 이르러, 지금 당장(當下)의 일거일동, 견문각지로써 자기 본래가 부처임을 체득함을 더욱 강조한다. 임운이란 사람의 몸과 마음을 그대로 행하여 자연자재한 자신의 심신 전체 그대로가 부처인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조사선에서 주장하는 “임운자유”와 일반 사람들의 생활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혜해선사의 법문에 이러한 문답이 있다.

 

  원율사가 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는 도를 닦음에 노력을 합니까? 스님이 말하기를, 노력한다. 어떻게 노력합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모든 사람이 전부 그렇게 하는데 스님의 노력과 같지 않습니까?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그들은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않고 백 가지로 분별하며, 잠잘 때 잠만 자지 않고 천 가지로 계교하니 따라서 다른 것이다. 율사가 입을 다물었다.

 

  대주혜해는 우리들에게 닦음(修)과 닦지 않음(不修)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임운수행(任運修습)은 행주좌와의 일상생활, 즉 견문각지(見聞覺知: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의 당하지심(當下之心) 가운데서 체현하는 것이다. 조사선선에서 이른바 견문각지는 진여본성의 작용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므로 마조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견문각지가 원래 너의 본성이며 또한 본심이다. 다시 이 마음을 떠나서 별따로 부처가 없다.

이것에 대해 황벽희운 또한 해석하기를,

 

  다만 견문각지 그곳에서 본심을 깨달아라. 그러나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견문각지 위에서 견해를 일으키지 말고, 또한 견문각지 위에서 생각을 움직이지 말라. 그리고 견문각지를 떠나서 마음을 찾지 말고 또한 견문각지를 버리고 법을 취하지 말라. 같이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며(不卽不離),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서(不住不着), 종횡으로 자재하니 도량 아님이 없다.

 

  일체 모든 법이 담연(湛然)하고 공적하여 필경공(畢竟空)이요 필경정(畢竟淨)이다. 그러므로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본성, 본심의 작용이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불성은 비록 견문각지가 아니지만 그러나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닦는 사람은 견문각지 가운데서 그 성품이 본래 공적함을 깨달아 같지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아서(不卽不離), 자연히 곧 번뇌 가운데서 보리를 증득하고, 세간사 가운데서 불사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유마경』에 또한 제시하기를, “법은 견문각지가 아니다. 만약 견문각지를 행하면 곧 견문각지일 뿐이어서 법을 구함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불법은 오염이 없다. 만약 세간법에 대해 여전히 집착한 바가 있고 내지 열반에 대해 역시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더러움에 탐착한 것이라 불법을 구할 수 없다. 불법은 견문각지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만약 견문각지를 구하면 그것은 견문각지의 감수와 마음의 의식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불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마조는 불성의 작용(有)의 입장에서 “견문각지가 본성이다.” 라고 말했고,『유마경』은 불성의 본체(空)의 각도에서 “법은 견문각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 것이다. 그래서 훗날 문각(文覺)선사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평술하고 있다.

 

   불법의 두 글자는 오직 부처에게만 이 법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중생에게는 이 법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불법이라 말한다. 부처(佛)란 깨달음(覺)의 뜻이니 깨달음은 곧 법이다. 깨달음은 미혹으로 인해 세운다. 어떤 것이 미혹인가? 산하대지를 보고 산하대지를 만들어 인식하고, 견문각지에서 바로 견문각지를 세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어떤 것이 깨달음인가? 산하대지를 보고 산하대지라 부르고, 견문각지에서 견문각지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똑같이 산하대지를 보고 똑같은 견문각지인데 어째서 미혹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가? 돌! 산하대지, 견문각지여! 몇 번이나 너를 향해 미혹을 말하고 깨달음을 말했던가. 결국 깨달음을 말하고 미혹을 말해도, 참됨을 말 하고 거짓을 말해도,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 중생을 인도하니, 나와 그대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은 본래 스스로 이루어지고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본래 생멸이 없고, 공(空)도 아니요 유(有)도 아니고, 참됨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고, 미혹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다. 오직 중생을 위하여 집착과 집착 없음, 걸림과 걸림 없음을 말하고, 망견으로 공도 있고 유도 있으며, 참됨도 있고 거짓도 있으며, 미혹도 있고 깨달음도 있음을 말한다. 만약 일념을 회광반조하면 자연히 만법이 갖추어지리라. 이 도리를 알고자 하는가? 나귀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또 온다.

 

  혜능이 일찍이『단경』에서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곧 견문각지해도 만 가지 경계에 물듦이 없고 항상 자재하다”라고 제시한 이후, 신회가『어록』가운데서 또한 “비록 견문각지가 있으나 항상 공적하다.”라고 설했다. 신회는 견문각지의 “공적영지(空寂靈知)”를 강조했는데, 즉 공적의 영지요 영지의 공적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성은 공적하면서 신령스레 알고, 신령스레 알면서 또한 공적하다. 자성의 공적영지에서 보면, 눈으로 보되(見) 봄이 없고 봄이 없되 본다. 귀로 듣되(聞)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되 듣는다. 몸으로 느끼되(覺) 느낌이 없고 느낌이 없되 느낀다. 마음으로 알되(知) 앎이 없고 앎이 없되 안다.

  그러므로 황벽은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이 있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며(不卽不離),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서(不住不着), 종횡으로 자재하니 도량 아님이 없다.”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이 “본래 생멸이 없고, 공(空)도 아니요 유(有)도 아니고, 참됨(眞)도 아니요 거짓(妄)도 아니고, 미혹(迷)도 아니고 깨달음(悟)도 아닌” 불이중도성(不二中道性)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만약 수선자가 일념 가운데 회광반조(回光返照)하면 자연히 만법이 청정공적함을 단박에 깨달아 임운자재(任運自在)하게 된다. 청안납자(靑眼衲子)를 놓고 말하면, 견문각지는 산하대지의 견문각지요, 산하대지는 견문각지의 산하대지이다. 그러므로 “산하대지, 견문각지여! 몇 번이나 너를 향해 미혹을 말하고 깨달음을 말했던가. 결국 깨달음을 말하고 미혹을 말해도, 참됨을 말 하고 거짓을 말해도,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한 도인은 “산하대지를 보고 산하대지라 부르고, 견문각지에서 견문각지하게 하는” 임운자재한 무사인(無事人)인 것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


見 - 보고,

聞 - 듣고,

覺 - 느끼고,

知 - 안다.

 

여기서의 각[覺]은 깨달음/지혜를 뜻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각지[覺知]를 단순하게 깨달아 안다라고 표현되어지면 안된다.

물론 느낌을 깨달아라고 표현한다면 맞다.

 

또한 [覺知]는 깨달아서 안다는 하나의 연결된 의미가 아니다.

즉 따로 따로이다.

그러므로 見/聞/覺知가 아니고 見/聞/覺/知 네 종류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반야경과 대지도론을 보면,

생각과 업의 발생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설명되어지고 있다.

 

↓ 아래는 반야경에 나오는사리불과 수보리존자 사이에서의 대화이다.

 

사리불이 말했다.

“인연이 없으면 업(業)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思]도 생기지 않습니다.

 인연이 있어야 업이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인연이 없으면 업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도 생기지 않거니와

 인연이 있어야 업도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보고[見]ㆍ듣고[聞]ㆍ느끼고[覺]ㆍ아는[知] 법 가운데서 마음이 생기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 못하는 법 가운데서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에는 깨끗한[淨] 것도 있고 더러운[垢] 것도 있으니,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업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으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생각[思]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위에서의 말씀처럼,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생각을 일으키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 못한다면 생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見聞覺知에서의 覺은 깨달음/지혜라는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생각을 일으키는 인연이 되는게 바로 見聞覺知이다.

 

 

↓ 아래는 대지도론에 나오는 용수보살의 설명이다.


업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며,

생각은 의업(意業)만을 말한다.

 

생각이야말로 진실한 업이고,

신업ㆍ구업은 생각 때문에 업이라 하는 것이다.

 

세 가지 업은 네 가지의 법으로 인한 것이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견문각지=見聞覺知]이다.

 

이 네 가지로 인하여 곧 마음이 생기며 이 마음은 인연에 따라 생기되,

혹은 깨끗하기도 하고 혹은 깨끗하지 않기[不淨]도 하다.

 

깨끗하지 않은 것은 죄업(罪業)이요,

깨끗한 것은 복업(福業)이다.


마음이 생긴걸 생각이라고 한다.

견문각지의 인연으로 마음이 생긴 것, 그것이 곧 생각이다


마음이 외부와의 접촉으로 인해 움직여 동한 것이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일으켜서 좋은 생각을 할 때는 선업을 짓고, 나쁜 생각을 할 때는 악업을 짓는다.

 

 생각과 업(선업/악업)과의 관계를 밝혀놓으셨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 覺이란 무엇인가?

 위의 반야경과 대지도론에서의 내용처럼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생각을 일으키는 요소이므로 覺을 <생각>으로 풀이하면 틀린 것이다.


 

또한 당연히 <지혜/깨달음>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업력을 일으키게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주범인 것이다.

 


대비바사론>에서는

6근 가운데 비근 · 설근 · 신근의 3가지 근 즉 코 · 혀 · 몸으로

대상의 냄새 · 맛 · 촉감을 지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바로 覺이라고 설명되어진다.


그러므로 覺을 느낀다라고 해석하는게 가장 옳다고 여겨진다.

見聞覺知 = 보고, 듣고, 지각하여 즉 느끼고, 안다.

 


생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는

보는 것과 듣는것,

그리고 느끼는 것과 알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고, 알아질 때 생각....즉 분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해탈하려면, 좋다 싫다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좋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탐욕이 생기고, 싫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분노가 일어난다.



본질이 공하므로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기에

좋다 싫다는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또한 인연화합으로 인해 보여지는 현상만 있을 뿐, 보는 자는 없고,

들려지는 현상만이 있을 뿐 듣는 자는 없고,

느낌만 있을 뿐 느끼는 자는 없으며,

앎만 있을 뿐 아는 자는 없다.


보는 자, 듣는 자, 느끼는 자, 아는 자가 있다고 여기는게 무명이다.

그런 주체로써의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치심이다.

어리석음. 무명이 곧 치심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 생각과 업의 발생


       불교 기초교리 90. 견문각지[見聞覺知




일반적인 해석[편집]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해석에 따르면, (見) · (聞) · (覺) · (知)의 각각은 다음을 뜻한다.[1][2] 이 해석은 부파불교설일체유부의 주요 논서 가운데 하나인 《대비바사론》 제121권에 나타난 견해와 일치한다.[3]

따라서 (見) · (聞) · (覺) · (知) 가운데 (見) · (聞) · (覺)은 전5식과 관련된 마음작용을 말하고, (知)는 제6의식 또는 그 보다 더 심층의 제7말나식 또는 제8아뢰야식과 관련된 의식작용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마음[心] 즉 6식 또는 8식이 외경(外境) 즉 객관세계를 접촉하는 것을 총칭한다.[1][2]

잡집론의 해석[편집]

대승불교유식유가행파의 주요 논서 가운데 하나인 안혜의 《잡집론》에 따르면 견문각지(見聞覺知)의 해석은 일반적인 해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잡집론》에 따르면 (見) · (聞) · (覺) · (知)의 각각은 다음을 뜻한다.[5][6]

먼저, '견문각지(見聞覺知)하여 파악한 의미[義]'라는 낱말이 사용되는데, 《잡집론》에 따르면, 이것은 견의(見義) · 문의(聞義) · 각의(覺義) · 지의(知義)를 통칭하는 낱말이다.[5][6]

  • 견의(見義): 보아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안근으로 보고 받아들인 것[眼所受]을 말한다.
  • 문의(聞義): 들어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이근로 들어서 받아들인 것[耳所受]을 말한다.
  • 각의(覺義): (覺) 즉 (尋)으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견의문의에 응하여 자연히 저절로 생각[思]이 구성[搆]되어 파악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尋)의 마음작용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思)와 상응하여 저절로 대강 그린[搆] 것을 말한다.
  • 지의(知義)는 (知) 즉 (伺)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받아들인 것[自內所受]을 말한다. 예를 들어, (伺)의 마음작용이 '보고 듣고 저절로 대강 그려진 것'을 (思) 또는 (慧)와 상응하여 적으로 의식적으로 '세밀하게 살펴서 파악한 것 또는 그린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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